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코바야카와 히데아키 (문단 편집) == 기타 == * <[[조선왕조실록]]>에서도 이름[* 엄밀히 말하자면 별칭인 '킨고'나 '치쿠젠 쥬나곤'으로 나온다.]이 종종 보이는 무장. 물론 [[조선]]측이 첩보로 얻은 정보가 대부분이라 다소 부정확한 내용도 많이 보인다. 그 예 중 하나인 [[http://sillok.history.go.kr/id/kna_12804019_009|정원이 비변사가 항왜를 공초한 것으로 아뢰다]]의 경우에는 [[가족]] 관계부터 틀려놓았다.[* 삼하가안은 [[도쿠가와 이에야스]]인데 히데아키는 이에야스의 아들이 아니다. 타카카게는 딸이 없다. 1595년 당시 히데아키는 14살이었다. 하지만 모든 부정확한 정보에도 불구하고 이 인물이 히데아키인걸 알 수 있는 것은 코바야카와와 관련되어 있고 축전주라는 사실을 통해서다.] * 죽은 오오타니 요시츠구가 "3년 안에 천벌이 내릴 것"이라고 [[저주]] 때문에 앓다가 죽었다는 설은 있었지만 이건 물론 야사다.[* 요시츠구의 저주에 대한 이야기가 처음 보이는 것은 17세기 말~18세기 초 성립된 군키모노(군담 소설)들이다.] 이외 '길에서 시비가 붙어서 칼에 베여서 죽었다', '식사를 나르다가 엎어버린 코쇼[* 시중을 드는 역할을 가진 비교적 신분이 낮은 무사 등의 자식.]에게 할복을 강요하다가 거꾸로 베여서 죽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방침 때문에 암살당했다', 낙마설 등이 [[사망]]의 원인으로 주장되나 일단 당대 기록상에 나타나는 것으로서 가장 신빙성이 높은 것은 쇼고인의 기록처럼 병으로 죽었다는 것이다. 2명의 형이 모두 병몰했기 때문에 '유전병이나 선천적으로 몸이 약한 것은 아니었는가'하는 설이 있다. 술로 인한 주독으로 죽었다는 의견이 현대에는 있다. * 자신에게 훈계를 하는 가신을 베어죽이거나 히데아키의 인물됨에 실망하여 재야로 내려갔다는 가신이 있다는 점하고 [[인기]]가 낮다는 점[* 우습게 볼 수 없는 것이 인기가 높은 무장은 낮은 무장의 공로까지 흡수하는 경우가 있다. [[사나다 노부시게]]와 [[모리 카츠나가]] 항목 참조.]에서 능력 면에서도 혹평을 받아왔으나 실제로 히데아키의 지배령에서는 [[정치]]와 [[경제]]가 안정되었다는 점과 전공을 세운 기록이 있기 때문에 창작 작품이나 후세의 평가만큼 무능한 인물은 아니었다는 것이 정설. 또한 기록에 따르자면 히데아키의 죽음을 [[백성]]들이 몹시 아쉬워했다는 부분이 남아있으며 가신에 대한 이야기의 경우 전형적인 [[다이묘]]들의 [[권력]] 장악 과정으로 해석하는 것이 요즘 학계의 주류 의견이다. * 어릴 적부터 총명하여 와카 등을 배우는 속도가 매우 빨랐다는 말도 있고 특히나 천하를 갈랐지만 정작 다수의 대다이묘들은 천하를 가르는 전투라고 생각조차 못했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 그렇게 넓은 영지를 지닌 다이묘는 아니면서도 [[병력]]을 정말 미친듯이 긁어모아 무려 15,000명의 병력을 동원해 요충지에 진을 쳤다. 정말 다수의 병력이다보니 도쿠가와 이에야스로부터는 참전을 댓가로 비젠과 미미사카 2개국을 포상으로 받을 것을 약속받았고 [[이시다 미츠나리]]로부터는 [[도요토미 히데요리]]가 성인이 될 때까지 [[관백]]의 자리와 함께 긴키 지방 2개국을 포상으로 받을 것을 약속받았던걸 보면 확실히 그냥 범용한 인물은 아니었던 듯하다. [[일본]] 내에서는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군을 치켜올리게 되었기에 코바야카와는 서군을 배신했기 때문에 부당한 비난까지 듣게 된 기색이 강하다. 어쨌거나 코뱌아카와 히데아키에 대해서는 다른 다이묘들과 마찬가지로 일본에서도 [[연구]]가 충분히 진행되지 않아서 불명확한 부분이 많다. 따라서 [[게임]]이나 [[소설]]의 인물됨은 어디까지나 후세의 창작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